한국인의 ‘한(恨)’을 사진에 담는 전문 작가가 있다.
윤하나(32·Hannah Yoon)씨.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포토 저널리스트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에서 2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난 윤씨는 온주 워털루에서 주로 자랐다.
윤씨는 어릴 적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제가 자란 동네는 80%가 백인이었다. 비한인들과 동화되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모임에 나갈 때마다 항상 ‘아시아인’으로 주목받았다”고 윤씨는 회상했다. 그런 관심을 내심 즐기기도 했다.
비한인들의 시선이 ‘또 다른 벽’에 불과했다는 건, 대학생 때 알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동화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무너진 자존감은 일상 생활조차 힘들 정도였다.
우연히 ‘한(恨)’에 대해 알게된 건 그때 였다. 세계에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정서. 분노와 원망의 극한 감정을 넘어 ‘처절함이 담긴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복잡한 감정의 응어리. 영어 단어 한두개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사진을 찍으며 그들 이야기를 음미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시사가에 살고 있는 크리스티 김(22)씨에게 한국계란 단어는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주홍글씨’다.
“저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먼저 증명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들(백인)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뛰어다녀야만 그나마 인정 받을 수 있다.”
존 강(24)씨는 고등학교 시절 생긴 열등감을 지금도 떨쳐내기 힘들다.
“백인들은 항상 저보다 뛰어나고 멋있었다. 그들에게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토론토에 사는 패트리샤 윤(34)씨는 한인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다.
“나이가 들수록 한국인라는 존재에 대해 이끌림이 강해진다. 하지만, 한인들과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국 문화와 정서 중 일부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윤씨는 한국에서 3년 동안 영어강사로 일하며 한국인으로의 삶을 몸소 체험했다.
한식과 쇼핑은 너무 좋았지만 ‘위계 질서’나 금방 뜨거워졌다 식는 ‘냄비 근성’은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작가’로 불렸다. 친구들의 일상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선물했다.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워털루 윌프리드로리에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로열리스트 칼리지(포토저널리즘 전공)에 문을 두드렸다.
생생한 현장 사진을 담아야 하는 윤씨는 위험한 지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8월14일 펜실베이나주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벌어졌던 총격전 때 윤씨는 뉴욕타임스로부터 연락을 받고 바로 뛰쳐나갔다. 2017년 남편과 결혼해 사건 현장 근처에 사는 것도 도움이 됐다.
8시간이 넘는 대치상황에서 100여발의 총격이 오갔다. 6명의 경찰이 부상을 당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총성이 울리는 와중에도 경찰차에 숨어 셔터를 눌렀다. 생생한 현장 사진은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윤씨는 지금도 여러 유명 언론사와 교류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가디언, 토론토 스타, 글로브앤드메일, 오타와 시티즌 등에 사진들을 보낸다.
지금은 친구 결혼식 촬영 때문에 이토비코 부모님 집에 머물고 있다. 지난 27일에도 뉴욕타임스에서 촬영 요청이 왔지만 완곡히 거절했다.
윤씨는 입양인 '스테판 태처(69)'씨에 대한 기억을 전했다.
그는 한국전쟁의 처참함이 남아 있던 1959년 미국 뉴저지로 입양됐다. 노년기에 접어 들수록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강렬해졌다
"미국에 살면서 많은 차별과 시련을 겪었지만 미국인으로 산것에 감사드린다. 이제는 한국 땅에 사는 한인으로 삶을 마무리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긍정의 힘'을 잃지 않는 한인들이 자랑스럽다는 윤씨.
"한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들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동지애'와 '감동'을 느낀다. 한국계 캐네디언으로서 우리가 애통함 속에 지켜온 정체성이 널리 공유될 수 있도록 한인들의 삶과 이야기를 전파하고 싶다"고 윤씨는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