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손영호 칼럼

본문시작



[손영호] '마리아 바이 칼라스(Maria by Callas)' (상)

손영호 by  조회 수:162 2019.04.22 16:44

오페라의 성녀(聖女) '칼라스'와 아내·엄마가

되고픈 여성 '마리아'의 내적 갈등 묘사

'마리아 바이 칼라스(Maria by Callas)' (상)

    손 영 호 (칼럼니스트·토론토)

 

  최근에 신복고(新復古) 트렌드의 영화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영국 록밴드 퀸(Queen)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비롯하여[註: 본보 2월10일자 '손영호 칼럼' 참조] 벌써 대여섯 번 리바이벌 된 '스타 탄생(A Star Is Born)',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그린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도 두세 번 리바이벌 된 영화이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1993)'가 제작 25주년 기념작으로 다시 상영되었다.

  또 있다. '전설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아 바이 칼라스(Maria by Callas)'가 출시되어 뉴트로(Newtro) 열풍에 가세했다.

Related image

▲ '마리아 바이 칼라스(Maria By Callas)' 영화포스터

  프랑스 사진작가이며 파리 샤틀레 극장(Theatre du Chatelet)의 디지털 AV담당자인 톰 볼프(Tom Volf)가 2013년 뉴욕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를 녹음한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광팬이 되었다. 그 후 3년여 동안 전 세계를 돌며 그녀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아 바이 칼라스'는 칼라스 사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 자신의 목소리와 노래만으로 구성되어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간 ‘By’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마치 오페라 가수로서의 직업적 이름인 ‘칼라스’와 여성으로서의 이름인 ‘마리아’라는 두 성격이 내적으로 갈등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러닝타임 113분.

  "20세기 오페라의 역사는 칼라스 이전과 이후 두 개의 시대로 나누어진다"고 할 만큼 전무후무한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요약한다면, 음악과 언어의 상호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철저히 캐고 들어가 음악 속에 간직된 드라마와 감정 및 성격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냈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

  요컨대 예술적 표현력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다양한 영역과 음역을 넘나들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최고의 인물로 승화시켰던 진정한 예술가요 배우이자 음악가였던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그리스 출신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11세 때 방송국의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라 팔로마'를 불러 1등을 할 정도였다. 마리아의 목소리에 기대를 걸었던 어머니는, 마리아가 14세 때 그리스로 건너가 아테네 국립음악원 최고의 성악 교사였던 마리아 트리벨라에게 딸의 오디션을 의뢰, '하바네라'라는 노래로 그의 제자로 만든다. 나이를 17세로 속여 1938년도 학기부터 마리아가 스칼라십을 얻어 아테네의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마담 트리벨라의 도움 때문이었다.

▲ 마리아 칼라스에게 오페라의 비결을 다 가르쳐 준 스승 엘비라 데 이달고(Elvira de Hidalgo, 1891~1980). <캡처사진>

 

  칼라스는 음악원에서 스페인의 왕년의 명 프리마 돈나였던 엘비라 데 이달고(Elvira de Hidalgo, 1891~1980)의 지도를 받게 된다. 이달고는 마리아에게 오페라에서의 노래의 비결을 속속들이 다 가르쳐 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칼라스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7월에 마리아가 출생지인 뉴욕으로 돌아가서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총지배인 에드워드 존슨을 찾아가 오디션을 받아냈을 때의 일이다. 존슨은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나비 부인'의 초초상 역과 '피델리오'의 레오노레 역을 제의했다. 마리아는 이런 역을 하기에는 너무 뚱뚱했기 때문에 무료라도 좋으니 '토스카'나 '아이다'를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존슨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구엘프 출신의 오페라 테너 가수였다.

  그러자 마리아는 총지배인에게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언제건 메트로폴리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노래해 달라고 애원할 날이 올 거예요. 그때가 와도 나는 절대로 응하지 않을 테니 단단히 기억해 두세요." 그로부터 거의 11년 후에 정말 그때가 왔을 때 존슨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1953년 '토스카(Tosca)'를 공연하는 마리아 칼라스. 컬러로 처리했다. <캡처사진>

 

  마리아는 1947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아밀카레 폰키엘리(1834~1886)의 '라 조콘다(La Gioconda)'의 주역으로 데뷔함으로서 그 전설적인 활약이 시작된다. 이때 그녀에게 인생의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다. 이 고장의 재벌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와의 만남이었다. 체중이 90(91,95)㎏이 넘는 뚱뚱보에 대식가인 마리아는 그녀보다 나이가 배도 넘는 아버지뻘인 메네기니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하여 1949년 봄에 결혼한 것이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f/Callas_Sirmione.jpg▲ 1950~1959년 동안 마리아 칼라스가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함께 살았던 빌라 - 이탈리아 북부 시르미오네(Sirmione) 소재. <위키피디아>

 

  그와 결혼하기 전후 4년간,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1878~1968)은 마리아를 지도하여 그녀를 위대한 드라매틱 아티스트로 만들어 놓았다. 메네기니의 후원으로 마리아의 멘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생활이 어려운 상태에 있던 어머니가 딸 마리아에게 월 100달러라도 좋으니 생활비를 좀 보내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돈이란 마당에 솟아나는 화초가 아니에요. …나는 살아가기 위해 목청을 돋우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는 아직 젊고(당시 54세) 일도 할 수 있잖아요. 살아갈 만큼의 벌이를 할 수 없다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낫겠지요." 이것이 마리아가 어머니에게 쓴 마지막 편지였다.

  사실 셋째 딸 마리아를 낳았을 때 그 어머니는 또 딸이라고 나흘 동안 보지 않을 정도로 모녀의 갈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언니들과는 달리 노래 부를 때 외엔 늘 찬밥 신세였다고 알려졌다.

  1950년 4월, 칼라스는 자기의 라이벌 레나타 테발디(1922~2004)가 갑자기 아파서 '아이다(Aida)' 대역 요청을 받은 것을 계기로 유럽 오페라의 메카로 알려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하여 이듬해부터 영광의 길을 내딛게 된다.

  당시 타임지에 칼라스가 테발디에 빗대어 "샴페인과 코냑, 아니 코카 콜라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하자, 발끈한 테발디는 "나는 칼라스가 갖고 있지 않는 한 가지 ―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은 그들의 라이벌 관계 및 성격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얘기로 회자된다.

(다음 호에 계속)

(손 영 호  칼럼니스트·토론토  2019. 4)

마리아칼라스(상).jpg